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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 이후 모든 고구리 태왕들은 자체연호를 썼다 (2부)
고국원제의 연수, 장수제의 건흥, 안원제의 연가는 유물로 출토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07/10 [12:54]

 

광개토호태왕은 391년 신묘년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자마자 군신들에게 지금 4(四海)의 모든 나라들이 연호(年號)를 쓰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없는 지가 오래되었소. 3(추모·유리·대무) 시절에 건원칭제하던 예를 살펴서 응당 새 연호를 세워야 할 것이오.”라고 명했다. 이에 춘 태자가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휘호(徽號)를 평안(平安)으로 하자고 올리니, 호태왕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삼국사기 고구려국본기>에는 어떤 왕도 자체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 중화사대주의 사상에 마취된 조선왕조에서 <삼국사기>를 각색하면서 감히 명나라 제후(조선)의 조상 고구려가 중국처럼 자체연호를 썼음이 불경하다는 이유로 고의로 지워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다른 사서에는 고구리가 자체연호를 사용했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구리사초략>에는 호태왕 이전에 시조 추모대제가 동명(東明), 2대 광명대제(유리명왕)가 유리광명(琉璃光明), 3대 대무신제가 대무(大武), 6대 신명선제가 신명(神明)를 사용했다. 이후 황제들은 자체연호를 사용하지 않다가 호태왕 때 이르러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는 고주몽성제가 다물(多勿)이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태조 무열제가 융무(隆武)라는 연호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러시아에 보관되어 있는 책인 요나라의 제천행사를 기록한 <요천제>와 청나라의 제천행사를 기록한 <만주대제>에도 고구리가 건원칭제한 기록이 있다. 1대 추모성왕이 다물(多勿), 6대 태조대왕이 융무(隆武), 16대 고국원왕이 연수(延壽)라는 연호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중 연수라는 연호가 새겨진 은합이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되어 눈길을 끌었다. 금관총이 과연 신라의 유적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대한민국 식민사학계는 출토되는 유물의 국적에 대해 항상 경상도 일대에서 나오는 유물은 무조건 신라,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나오면 무조건 백제 유물, 한강 이북에서 발견되는 것은 무조건 고구려 거라고 말한다. 한강이남 경기도에서 출토되는 유적은 그 모양에 따라 국적을 구분하고 있다.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국적 감별사로 아마 삼척동자(?)를 시켜도 아무 문제없을 걸로 보인다 

 

▲ 경주 서봉총에서 발견된 연수 원년(331)이 뚜렷한 은합     © 편집부


호태왕 이후에는 고구리의 모든 태왕들이 다음과 같은 자체연호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20대 장수제의 건흥(建興), 21대 문자명제의 명치(明治), 22대 안장제의 안장(安藏), 23대 안원제의 대장(大藏), 24대 양원제의 영강(永康), 25대 평원제의 대덕(大德), 26대 영양제의 홍무 (弘武), 27대 영류제의 함통(咸通), 28대 보장제의 개화(開化)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요천제>라는 책에는 23대 안원제의 연호가 연가(延嘉)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 연호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었다.  

 

▲ 광배의 후면에 23대 안원제의 연가 7년(537)명이 뚜렷한 금동여래입상     © 편집부


이 점만 보더라도 광개토호태왕을 기점으로 고구리의 위상이 한층 업그레이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위 장수제의 건흥, 문자명제의 명치, 평원제의 대덕, 영양제의 홍무, 보장제의 개화 등은 <태백일사>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이렇듯 고구리 태왕들의 건원칭제는 역사적 사실임이 이미 입증되었음에도 대한민국 사학계는 여전히 모로쇠로 일관하고 있다.

 

공부를 안 하는 건지,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건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개인의 열정과 애국심 때문에 국가의 지원도 없이 사비를 들여 역사를 찾고 있는 재야사학들의 눈에는 잘도 보이는 것이 왜 대한민국 역사학 박사님들 눈에는 그런 건 안 보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중국 동북공정의 핵심이 바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인바, 그런 고구리가 어떻게 자체연호를 쓸 수 있었느냐고 중국에 반문하고 싶다. 출토 유물로 사서의 기록이 이미 사실임이 다 입증되었음에도, 유독 대한민국 사학계만 이에 대해 여전히 입을 굳게 닫고 있다. 이는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매국행위인 것이다. 

 

참고로 광개토호태왕의 즉위연도를 <삼국사기>392년이라 기록했고, <고구리사초략>에는 391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태왕 2(392) 임진 정월, 신라 내물왕이 운모와 하모 두 딸을 보냈기에 좌·우 소비로 삼고, 수행해 온 보금을 소비들이 머무는 궁전의 대부로 삼았는데 보금은 내물왕의 조카로 키가 크고 유식했다고 한다. 태상후 해씨의 소생으로 과부가 된 천성 공주를 보금에게 처로 주었다.

 

3, 나라의 토지신과 조종을 모시는 사당을 세웠기에, 호태왕이 태후를 모시고 두 황후와 함께 온탕에 가서 선제를 기리는 도장을 7일간 열었다. 새 고기가 올라온 것을 보고는 무슨 새냐고 물었더니 포곡(布穀=뻐꾸기)이라 하기에 물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평양황후가 태후께서 좋아하신다.”고 아뢰었더니, 호태왕은 그럼 태후께만 드리시오.”라고 말했다. 쑥스러워진 태후는 폐하께서 아니 드시는데 어찌 감히 신첩이 먹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나라사람들이 뻐꾸기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 울음소리는 애처로우나 생김새는 맹금류와 닮은 야생 뻐꾸기    

 

이듬해 호태왕은 두 황후에게 명해 친히 나라 안의 건장한 여인들을 가려 뽑아 병사로 삼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연습시키라고 명했다. 평양황후의 꿈에 부처가 오시어 동자를 내려 주며 이 아이가 무량수(無量壽)이니라.”라고 말했다고 아뢰자, 호태왕이 이 말을 듣고 평양성과 도성 세 곳에 절을 짓고 불도를 널리 퍼지게 하라고 명하니 이것이 아홉 절(九寺)의 유래라고 한다

 

4(394) 갑오 2, 평양황후가 아들 거련(巨連=장수태왕)을 낳았는데, 생김새가 심히 듬직하고 목소리도 웅장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앉았다고 한다. 호태왕이 보고는 이 애가 태조를 닮았구나.”라고 말하고는, 황후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하기를 좋아하더니만 이렇게 훌륭한 아이를 낳았소. ()이 불()보다 못한 것이 아닌가 보오.”라고 하고는 선원(仙院)들을 수리하라고 명했다.

 

다음 연재부터는 호태왕의 정복전쟁이 다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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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7/10 [12:5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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