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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공정의 취소와 한국인이 취해야 할 자세 (1부)
2002년부터 시작한 고구려공정을 2007년에 취소한 중국정부
 
정인갑 전 칭화대교수 기사입력  2017/09/01 [00:36]

중국은 고구려공정을 2007년에 취소했다. 본 논문에서는 고구려 공정을 끝낸 후의 대체적인 상황을 소개하고 그에 따르는 한국인들이 마땅히 취해야 자세에 관하여 언급하기에 앞서 우선 고구려공정의 유래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하겠다.

 

1. 중국 고구려공정의 유래

기원전 1세기 말에 편찬된 중국의 첫 역사서 <사기史記>로부터 시작된 <이십사사二十><청사고淸史稿>에 한반도 모든 나라의 역사가 중국역사에 편입돼 있었다. 1897년 조선이 청의 속국으로부터 탈퇴하여 독립국으로 된 후 중국은 한반도 국가의 역사를 중국역사에서 빼서 외국역사로 취급하였다.  중공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영토본위를 국사편찬의 원칙으로 함에 따라 현유 중국판도 밖의 모든 지역은 그가 옛날 중국에 속하였다 하더라도 중국역사에서 배제해버리고 외국역사에 편입시켰다.

 

가장 전형적인 예로 몽고는 194615일에야 중화민국 정부가 독립국가로 인정하였고, 19491016일에야 중공정부가 독립 국가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몽고를 외국역사에 넣었지 종래로 중국역사에 넣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일부는 중국영토 안에 있고 일부는 중국영토 밖에 있었던 고구려에 관해서는 중국역사에 뺏다 넣었다하며 엇갈리는 양상을 보였다.

 

1949년 중공정부 성립부터 1960년대까지 중국의 모든 출판물과 역사교과서에 고구려는 외국역사 즉 조선역사로 돼 있었다. 역사학 대가 곽말약郭沫若, 당란唐蘭과 전백찬翦伯贊 등이 집필한 모든 권위 있는 역사책과 역사교과서에 다 이렇게 취급돼 있다.

 

1960년대 북한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주은래 총리는 말하였다: 요하遼河와 송화강松花江 일대에 고대조선민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중국왕조가 조선을 침략하여 당신네 땅이 너무 좁아졌다. 우리는 조상을 대신하여 당신들에게 사과한다.” “두만강, 압록강의 서쪽이 종래로 중국의 땅이라고 역사를 왜곡하면 안 된다(1963).”  모택동도 당신네 땅을 내가 점령한 것이 아니다. 수양제隋煬帝, 당태종唐太宗무칙천武則天이 한 일이다. 봉건주의가 당신네 변경이 요하 동쪽인 것을 압록강 변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다(1964).”

 

1960년대에 북한의 고고학자와 중국의 고고학자는 중국 동북삼성에서 고구려 유적지에 대한 대규모의 합동 발굴을 두 차례 진행했다. 발굴된 고구려 문화재를 모두 북한에 주었다. 고구려가 조선역사에 속하기 때문이었다.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등을 집필한 원로 역사학가 김육보金毓黼1960년경에 처음으로 고구려가 중국역사상의 지방소수민족정권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그러나 당시의 국내, 국제정세와 문혁 등 정치동란 때문에 이 견해가 학술계와 사회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1978년 필자가 북경대학에서 중국통사를 배울 때 북경대학 중국통사 교과서에 이미 고구려는 당나라 때 중국의 지방소수민족정권으로 돼 있었다.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기는 아마 1970년대 중반부터가 시작이라고 짐작된다. 1979년 필자가 중국주재 북한대사관 김영남과 같이 중국통사 강의를 들을 때 장전희張傳喜 교수는 고구려 부분을 뛰어넘고 강의하지 않았다. 앞에 앉아 강의를 듣는 김영남을 염두에 두고 한 처사인지, 아니면 고구려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는 견해에 동의되지 않아서인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 고구려의 중국역사 편입을 주장하는 학자는 몇 안 되었다. 중국의 법에 고등학교까지의 교과서는 엄격히 국정교과서만 써야 하고 대학은 일개 교수의 개인견해로도 교과서를 편찬하여 쓸 수 있다. 19937월 중국 길림성집안시에서 고구려 문화세미나가 열렸을 때의 일이다. 그 번 세미나에 한국인 80여 명, 북한인 4명 및 중국인 30여 명이 참가했으며 필자도 참가했다.

 

남북한 학자와 중국학자가 모두 고구려를 자기 나라의 역사라고 주장하다가 끝내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고구려는 대체 중국역사냐, 한국역사냐라는 질문에 집안시 문물관리국장 경철화耿鐵華당연 중국역사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북한학자 박시형朴時亨이 단상에 올라가 아주 격렬한 어조로 그 논조를 반박하였으며 요녕성 사회과학원 학자 손진기孫進己박시형을 다시 반박하며 회장은 일대 아수라장이 되었었으며 회의는 더 진행할 수 없었다.

 

그때 중국·조선사 사학회 비서장 풍홍지馮鴻志중국·세계사 사학회 학자는 100%가 고구려를 조선역사로 보고 중국·중국사 사학회 학자도 거의 다 조선역사로 취급한다. 중국역사로 보는 학자는 김육보와 그의 제자 네댓뿐이다. 그러나 냉전종식 이래 소련, 유고슬라비아 등의 해체가 모두 민족모순으로 유발된 것이고 또한 그때 미국을 수반으로 하는 서방 국가에 중국이 곧 6개 나라로 해체된다는 여론이 파다하므로 중국당국은 고구려 역사의 중국사화를 선호하므로 그 견해를 반대하는 학자들은 모두함구한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그 후 고구려 문제에 관한 논쟁은 끊임없었으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차원에서 학술논쟁으로 취급하였지 국가에서 공식 태도를 표시하지는 않았다.

 

▲ 제4회 고구려 국제학술세미나에서 강연하는 정인갑교수     © 편집부

 

20001018일 중국신문출판총서中國新聞出版總署 산하 도서출판관리사에서 앞으로 출판물에 고구려는 중국 고대 동북소수민족지방정권이다 라는 견해로 통일한.’ 라는 결정을 내렸다.이는 중국정부의 고구려역사에 대한 최초의 공식 태도 표시이다.

 

20022월 고구려공정이 출범했으며 고구려 문제를 정식 국가 프로젝트로 다루기 시작했다. 공식명칭은 동북변방 역사와 현황 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研究工程)’이고 인민폐 1,500만원(약 한화 2,700억원)의 예산을 투입했다. 당시 중국의 평균 봉급이 한국 평균봉급의 10분의 1임을 감안하면 27천억 원이 투입된 셈이다. 금광채굴에 뛰어드는 사람이 갑자기 팽창하여 고구려를 중국사로 보는 학자가 네댓뿐이던 것이 갑자기 많아졌다.

 

2003624일 중국 <광명일보光明日报><고구려역사연구의 몇 가지 문제를 논(試論高句麗歷史研究的幾個問題)>이란 제목의 문장을 발표하였다. 이 문장에서 구려 정권의 성격을 마땅히 중국 중원왕조의 제약을 받으며 지방정권이 관할한 중국고대변방민족정권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단정하였다. 이 문장이 발표되자마자 한국의 학계와 매체의 큰 반발을 유발하였다. 한국은 고구려공정에 대한 총공격을 단행하였으며 이른바 고구려역사 보위전이 발동되었다.

 

한양대학 교수 신용하慎镛厦는 고구려공정을 역사제국주의 작업이라 점찍었고, 한국외교부차관 이수혁李秀赫한국정부는 강경태도로 중국의 고구려역사 왜곡에 대응할 것이며 모든 대가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2003129일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고학회, 한국근대사학회 등 17개 학회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연합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에서 중국은 마땅히 고구려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왜곡의 행위를 즉각 정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2004917일 중국의 제의로 한중 두 나라의 학자가 서울에서 고구려 역사의 귀속에 관한 학술포럼이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한국은 또한 대중선전수단을 총동원하여 중국의 고구려공정에 반격을 가하였다. 이를테면 역사극 <>, <태왕사신기>, <연개소문> <대조영> 등을 제작하여 방영하였다. 북한 학술잡지 <역사과학>은 문장을 발표하여 고구려는 조선민족의 국가였다. 우리나라 인민은 시종일관하게 고구려를 조선역사체계 중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라고 강조하며 한국과 입장을 같이 하였다.

 

2007년 당시 중국 외교부 부장 이조성李肇星은 고구려공정에 참가한 학자들의 좌담회를 소집하고 고구려공정의 취소를 통보하였다. 상기 중국 고구려공정의 유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2,300년 전부터 1897년까지 중국 역대 문헌은 고구려를 중국역사로 취급하였다.

조선이 청국의 속국을 탈퇴하여 독립국으로 된 후 1898년부터 1949년 중공정부의 수립을 거쳐 1960년대까지 중국은 고구려를 외국역사 즉 조선역사로 보았다.

1960년경에 고구려를 중국 지방소수민족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생기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 중국 대학교과서에 고구려를 중국 지방소수민족정권으로 취급하는 내용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이것이 국정 견해는 아니고 일부 학자의 주장이었다.

2000년 고구려를 중국 지방소수민족정권으로 보는 견해가 국가 공식견해로 출범 고구려를 중국 지방소수민족정권으로 보는 국책의 관철을 위해 20022월부터 했다.

본격적인 작업고구려공정을 출범시켰다.

2007년 중국정부는 고구려를 중국 역사화하는 고구려공정을 취소키로 결정했다.

 

(2)부에 이어집니다.

 

 

정인갑鄭仁甲이력 

본 관 : 평북 철산군, 1918년에 이주한 조선족 3. 

출 생 : 19478, 중국 요녕성遼寧省무순시撫順市. 

학 력 : 북경대학 중문학과 고전문헌古典文獻전공 졸(1978, 3~1982, 2). 

직 장 : 중화서국(한국 국가편찬위원회에 해당) 편심編審, 사전辭典부장(1982~은퇴). 

          청화대학淸華大學중문학과 객좌 교수(1992은퇴). 

학술배경중국음운학회中國音韻學會이사理事. 중국사서학회中國辭書學會회원. 

사회직무<베이징저널(재중국 한국인 신문)> 부주필(19972003), 칼럼니스트. 

<베이징뉴스> 주간 신문 주필(2004~2005), 칼럼니스트 

<CHOSUN.COM·정인갑의 한중내시경> 칼럼니스느(2013~2016). 

전 황하문화원黃河文化院대표. 

현 북경고려문화경제연구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 

현 한중미래재단 이사장. 

저 서<경전석문 색인>(중문), 북경, 중화서국, 1997. 

<HSK응시지남 보도>(한글), 서울, 다락원, 1998. 

<중국문화COM>(한글), 서울, 다락원(2002) 12. 

논 문중국어발달사에 관한 논문 등 10여 편. 

중국조선족에 관한 논문 등 10여 편. 

기타 논문 50여 편. 

번  역 :  <나의 부친 등소평>(중역한), 毛毛(등소평 딸) , 한국 문출판사(1993). 

<일본에 말한다>(한역중), 정몽준 저, 북경대학 출판사(2002). 

20여종, 600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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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09/01 [00:36]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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