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구리보전회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열가지 증거 없이 정설 부정과 신설 주장 불가 (3부)
고구려공정 취소 후 한국인이 취해야 할 3가지 자세
 
정인갑 전 칭화대교수 기사입력  2017/10/19 [13:03]

 

3. 고구려공정 취소 후 한국인이 취해야 할 자세

 

중국의 고구려공정이 취소된 지 장장 10년이나 지났는데 한국사학계나 한국국민의 의식은 아직 10여 년 전의 정도에 머물러 있다. 이는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한국사학계나 한국국민은 반드시 새로운 변화에 따라 자기의 의식과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첫째, 너무 중국의 고구려공정을 물고 늘어지지 말았으면 한다.

필자는 자주 한국의 대학, 사회단체 또는 기타 사람들에게 중국에 관한 이러저러한 특강을 한다. 특강이 끝날 무렵이면 꼭 청중자들의 질문을 받고 해답하는 절차가 있다. 그러면 자주 고구려공정에 관한 질문이 올라온다. 역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를테면 중국어에 관한 특강을 하여도 이런 질문이 나온다. 질문하면서 중국정부를 한바탕 욕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이 이미 고구려공정을 잘못된 일이라고 인식하고 취소한 지 10년이 지났다. 또한 잘못을 시인한 인식을 실천에 옮겼다. 이는 중국정부가 잘못을 승인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이런 질문이 올라온다. 중국정부, 또는 중국 역사학계의 책임자가 한국에 찾아와 공개사과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전의 것은 없는 것으로 하고 앞을 내다보며 서로간의 우의를 증진시키는 것아 바람직하다.

 

둘째, 한국인들이 중국에 가서 고구려에 관한 방자한 말들을 삼가 했으면 한다.

사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한 객관적 원인 중 한국인의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 동북 삼성을 돌아다니며 걸핏하면 이거 다 옛 고구려 땅 아니가? 앞으로 우리 한국이 이 땅을 꼭 다시 빼앗아야지.’ ‘당신네 조선족들 우리말 똑바로 들어. 그리고 힘을 키워! 앞으로 우리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을 때 조선족들이 앞장서야 하지 않겠나!’라는 말을 식은 죽 먹듯이 하군 하였다.

 

중국이 정치적 목적 하에 고구려공정을 가동한 데는 한국인의 이런 난설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극히 오류적인 언론이고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또한 한국과 중국조선족에게 엄청난 피해가 생길 수 있는 무모한 행위이다. 이에 관한 해석은 편폭상의 제한으로 본문에서 할애하니 이 문제에 취미를 느끼는 독자는 필자와 단독으로 만나 이야기하기 바란다.

 

셋째, 중국의 일부 학자가 개인적으로 고구려역사의 중국역사화를 고집하는 것을 윤허하여야 한다. 모든 학술문제는 백호하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방법으로 같지 않은 견해를 충분히 발표하고 토론하게 하여야 한다. 진리는 변론할수록 명백해진다. 무릇 실사구시의 역사에 거역되는 인식은 결국은 역사 흐름의 대하에서 서서히 까라 앉고 말 것이다.

 

하물며 중국이 고구려공정을 하며 고구려역사의 중국역사화뿐만 아니라 다른 성과들도 이룩하였으니 말이다. 이를테면 고구려의 복잡한 지명, 사건 발생지 등을 일일이 연구 고증하고, 지방지·민간전설 등과도 결합시켜 마침내 고구려의 역사지도를 복원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필자자의 고향 무순시撫順市지명을 해명한 예를 들어보자.

 

무순시 중심의 동쪽 5킬로(무순의 옛 중심지)에 성도 없는데 무순이라는 지명이 있고 북쪽 산 위에는 탑이 있으며 고얼탑(高爾塔)’이라 부른다. 그 남쪽 약 8킬로에 노호대老虎臺’, 동쪽 15킬로에 대화방大伙房’, 서쪽 15킬로에 이석채李石寨라는 지명이 있다. 그사이 무순인은 이런 지명에 역사적 내용이 있음을 전혀 모르며 살았다.

 

현재 고증에 의하면 이곳은 고구려의 변방 도시이며 이런 지명은 다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고얼탑고려탑高麗塔의 와전訛傳이고 탑 앞의 비탈진 곳을 발굴한 결과 옛 성의 흔적이 드러났다. 1500년 전의 성이었으니 지금은 유야무야할 정도로 되었다. ‘노호대노고대老鼓臺의 와전이다. 큰 북을 설치한 누대라는 듯이다. 이석채는 이씨채李氏寨의 와전이다(‘의 중국어 발음이 비슷하다). ‘대화방식사하는 큰 집이라는 듯이다.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의 무순성을 칠 때 노고대에 큰 북을 설치하고 북소리에 의해 동··남 삼군이 움직였을 것이다. 대화방은 동쪽에 위치한 군사가 식사하는 곳이었다. 당나라 군대가 먼저 서쪽의 한 읍을 점령하여 조정에 희소식을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당 왕족의 성이 이씨이므로 그 읍의 이름을 이씨채李氏寨로 고치라고 명령하였다는 것이다. 무순이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이긴 첫 승전지라는 설까지 있으나 이는 좀 더 고증연구할 필요가 있다.

 

수백 년을 지나면서도 방임되었던 이런 지명이 해명된 데는 중국사학자들의 수고스러운 노력과 갈라놓을 수 없다. 만약 고구려가 남의 나라라고 하면 이렇게 주인공다운 노력을 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이런 연구 결과는 다 우리민족의 역사연구에 대한 공헌이기도 하다. 어쩌면 화가 복이 된 셈일지도 모른다. 우리 한국인이 타국에 가서 이런 연구를 하기는 매우 불편하지 않은가.

 

▲ 중국이 표면적으로나마 동북공정을 중단한 이유는 한국 내에 중국의 지점인 동북아역사재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편집자 주)     © 편집부

 

사실 한국인들의 역사에 대한 오류 인식이거나 심지어 왜곡하는 행위도 적지 않음을 강조하고 싶다. 두만강은 지금 연길시 복판을 흐르는 부르하통하라는 설, 지금의 대동강인 패수浿水지금 중국 하북성의 난하灤河, 심지어 회하淮河라는 설, 한사군의 위치는 지금의 압록강, 두만강 서쪽에 있으며 심지어 중국의 섬서성陝西省일대라는 설, 한민족은 8천여 년 전부터 철기를 제작해 썼다는 설, 단군문화는 황하문화와 대등하거나 심지어 그 역사가 황하문화보다 퍽 더 유구하다는 설등등이다.

 

그중 한사군의 위치가 지금 중국의 섬서성 일대라는 설만 간단히 살펴보자.  

<사기史記>양복楊僕이 제로부터 발해를 건너고조선왕 우거右渠왕을 공격했고 , ‘좌장군 순체荀彘5만 병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부터 우거를 공격하였으며’, ‘누선樓船장군은 7천의 제병을 거느리고 먼저 왕검성王儉城에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한서漢書>의 기록도 이와 거의 같다.이렇게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곳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만약 한사군 지역이 지금 중국의 섬서성 일대이라면 섬서성 서쪽에 요동, , 발해가 있고 그 서쪽에 중국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섬서성 서쪽에서 당연 이런 지명을 찾을 수 없다. 일단 지명을 위조하였다고 가정하자(2천여 년 전의 중국 사학자가 이런 지명을 위조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섬서성에서 반경 1천 킬로 안에는 바다가 없다.

 

섬서성 서쪽의 가장 가까운 바다가 카스피해이고 카스피해의 서족은 터키, 즉 고대 중국은 지금의 터키 부근에 위치해 있었다는 말이 된다. 또한 섬서성 동쪽은 고조선이여야 하며, 그러면 지금 중국의 4/5영토가 고조선의 영토가 된다. 이는 너무나 상식에 어긋나는 설이다.

 

그 정도는 고구려를 중국역사상 지방 소수민족정권이라는 설보다 더욱 황당무계하다. 그러나 중국학자들은 이런 설에 대해 거들떠보지도, 평가하지도 않는다. 백화제방의 원칙을 준수해야 하고 또한 황당한 소리는 아무리 해봤자 다 역사의 대하에 묻혀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최근 20여 년간 한국에는 아마추어 역사학자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는데 이는 경하할 바이다. 전 국민이 역사에 관심을 두고 참여하니 좋은 현상이 아닌가. 그러나 명심하여야 할 것은 역사는 과학이다. 옛날 중국에 예불십법불파例不十法不破’, ‘예불십법불립例不十法不立이라는 격언이 있다. 즉 열 가지 증거가 없이는 정설定說을 부정할 수도, 신설新說을 주장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자면 수십 년의 각고연찬이 필요하다.

 

                                                                                     20177. 정인갑

  

정인갑鄭仁甲이력

본관 :   평북 철산군, 1918년에 이주한 조선족 3.

출      생19478, 중국 요녕성遼寧省무순시撫順市.

학      력북경대학 중문학과 고전문헌古典文獻전공 졸(1978, 3~1982, 2).

근무직장중화서국中華書局(한국 국가편찬위원회에 해당) 편심編審, 사전辭典부장(1982~은퇴).

               청화대학淸華大學중문학과 객좌 교수(1992은퇴).

학술배경중국음운학회中國音韻學會이사理事. 중국사서학회中國辭書學會회원.

 

사회직무<베이징저널(재중국 한국인 신문)> 부주필(19972003), 칼럼니스트.

<베이징뉴스> 주간 신문 주필(2004~2005), 칼럼니스트

<CHOSUN.COM·정인갑의 한중내시경> 칼럼니스느(2013~2016).

전 황하문화원黃河文化院대표.

현 북경고려문화경제연구회 부회장 겸 사무총장.

현 한중미래재단 이사장.

 

저 서<경전석문 색인>(중문), 북경, 중화서국, 1997.

<HSK응시지남 보도>(한글), 서울, 다락원, 1998.

<중국문화COM>(한글), 서울, 다락원(2002) 12.

논 문중국어발달사에 관한 논문 등 10여 편.

중국조선족에 관한 논문 등 10여 편.

기타 논문 50여 편.

 

역 작<나의 부친 등소평>(중역한), 毛毛(등소평 딸) , 한국 문출판사(1993).

<일본에 말한다>(한역중), 정몽준 저, 북경대학 출판사(2002).

20여종, 600만자.

 

 

본 고구려역사저널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면죄부를 줄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는 위 논문을 게재한 이유는 중국 역사학계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자는 취지에서였습니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7/10/19 [13:03]  최종편집: ⓒ greatcorea.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