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구리보전회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이익의 압록강, 한백겸의 청천강, 안정복의 대동강 패수설 (3부)
 
이찬구 (사)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사무총장 기사입력  2017/10/24 [17:07]

 

3. 패수에 관한 종래의 학설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었던 패수에 대해 종래에는 대동강, 압록강, 요하, , 헌우락, 고려하, 청천강, 대릉하, 난하 등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었다. 이러한 견해들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패수에 대한 제 학설

근거 문헌 및 주장자들

    압록강설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유형원, 이익, 정약용,

   백조고길, 쓰다소키치, 노태돈, (송호정)

    청천강설

   한백겸, 금서룡, 담기양, 이병도

    대동강설

   역도원(수경주), 김부식,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사략,

   유득공, 이나바이와기치, 송호정

    요하설(대요수)

   홍여하(1672), 西川權

   어니하설 또는

   헌우락설 (해성하)

   요사(지리지), 신경준, 동국문헌비고, 김정호, 신채호

   난수(난하)

   김경선(1788~1853), 장도빈, 문정창, 윤내현, 이덕일

   혼하설(요하, 소요수)

   성해응, 김남중, 서영수, 박준형

   대릉하설

   림건상, 리지린(1963), 최동

   요동설

   박지원(1780)

   조하설(조백하설)

   환단고기

   고려하(산해관)

   정인보(1946, 漢代의 패수, 沛水는 대릉하)

   사하설(沙河, 길림성)

   大原利武

    六股河   산해관 동쪽)

   최은형(연변)

   저탄수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당하

   김봉렬, 이찬구

 

신운용은 패수인식은 두 가지의 상반된 양상으로 보고, 하나는 패수 국내설, 다른 하나는 패수 요동설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점을 참고하고자 한다.

 

패수 국내설 : 압록강설·청천강설·대동강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압록강설은 동국여지승람의 영향을 받아 윤두수·오운·유형원·이세구·이익·이만운·이긍익 등이 패수 압록강설을 주장하였다. 청천강설은 한백겸이 주장하였다.

 

대동강설은 박상·유희령·유득공·한진서·홍경모·윤정기·이유원 등이 주장하였다패수 대동강설은 위만이 패수를 건너 왕험성을 점령하였으므로 당연히 왕험성(평양)은 대동강 아래 있어야 한다는 사기한서의 기록과 모순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득공은 왕험성이 대동강 건너 토성리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패수 요동설: 홍여하가 팔주 땅 요하 지류설을, 신경준·김정호가 ()니하설을, 김경선의 난수()

설을, 성해응의 소요수(혼하, 심하)설을 주장하는 등 요동설도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되었다. 지만

패수 요동설을 주장한 조선의 학자들도 김경선 이외국내설과 낙랑의 평양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는 못하였다. 

 

▲ 패수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주장 종합     ©편집부

 

1814년 다산 정약용은 고금의 패수에 관해 다섯 가지 주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조선전)에 의한 압록강 패수설, 수경한서(지리지)에 의한 대동강 패수설, 고려사

(지리지)동국여지승람에 의한 저탄수 패수설, 요사(리지)일통지에 의한 헌우락

패수설, 한백겸의 청천강 패수설 등을 근거 문헌에 의해 열거하고 있다.

 

정약용 자신은 이 패수설에 대해, “연나라가 조선과 패수로 경계를 정하였다고 하는데, 만약 대동강이

이 패수에 해당한다면 어찌 다시 조선이 있을 수 있겠는가? 왕험이란 바로 평양인데 위만이 이미 대

동강을 건넌 이상 자연 평양에 다시 도읍할 수 없었을 것이니, 압록강이 패수라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

!”라고 주장하며 압록강 패수설을 옹호하고 있.

 

일제시기 쓰다 쏘오키치(津田左右吉)와 시라토니(白鳥庫吉)도 압록강설을 주장했다. 이 압록강의 상

류는 백두산 천지이며, 황해(서해)로 들어간다. 이와 같은 정약용의 압록강설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51, 평양부)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관찬, 사찬할 것 없이 패수 대동강설은 패수 요

동설로 옮겨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이는 한사군에 대한 인식에서 한계를 드러낸 유교사관을 대

체할 새로운 사관이 출현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 이러한 맥락에서 대한제국기와 대일전쟁기 단군

중심의 사관과 영토 의식 확장의 배경과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학설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압록강설-이익

패수 압록강설을 구체적으로 논증을 시도한 이는 이익(1681~1763)이다. 그의 패수 압록강설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나올 때에 홍범(洪範)의 원리를 가르쳐 윤리를 바로잡아 놓았으니, 그 공적이 매우 컸

. ~그러다가 후손이 교만하고 포악해지자 연()에서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어 그 서쪽을 공격하여 2천여 리

의 땅을 빼앗고 만반한(滿潘汗)까지를 경계로 삼으니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 그런즉 당초에 봉한 지역은

사실상 연 나라와 접근해 있었으니, 지금 만리장성 밖으로 요하(遼河)와 심()의 지역이 모두 영토 안에 들었

던 것이다.

 

만반한(滿潘汗)은 어디를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연 나라의 동쪽에는 이렇게 큰 땅이 없다. 지금 의주(

)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가 14백 리에 불과하니, 생각건대 만(滿)은 지금의 만주(滿州)로 청()의 왕업이

시작된 곳이요, ()은 심()의 잘못인 듯하다. 곧 우리나라의 강계(江界) 이북과 백두산 큰 줄기의 서쪽이 모

두 연()의 통치하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연과 패수(浿水)를 국경으로 삼았다 했으니, 여기서 패(浿)는 취()의 잘못으로 곧 압록강(

綠江)인 듯하다. 위만(衛滿)이 취수(溴水)를 건너와서 위와 아래의 방어선을 모두 소유하였으니 이곳은 곧 단군

(檀君)과 기자(箕子)의 옛 영토이며 남으로는 삼한(三韓)과 국경이 되었. 이것은 조선지방의 연혁이다. 뒤에

고구려가 또 요하[]와 심수[]지역을 모두 차지하였으니 그것은 옛 터전을 수복한 것이었는데 그 말기에

와서 발해(渤海)가 이곳을 점령하였다가 그대로 요()에 편입되었고 왕 태조(王太祖)는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였.”

2) 청천강설-한백겸

한백겸(1552~1615)은 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삼한 위치설을 극복하고, 패수의 위치를 한강 이북으로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다.

 

패수는 본주에 패수가 서쪽으로 흘러 증지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다.’고 되어 있다. 내가 살펴보건

, 진과 한이 모두 패수를 조선의 북쪽 경계로 삼았다. 이는 패수가 대동강이 아니라는 심히 명백한 증거이다.

마자수가 서개마에서 나와서 서안평에 들어간다.’ 되어 있다. 이것이 압록강이 됨이 마땅하다. 청천강이 압

록강과 대동강 사이에 있으니 이것이 패수인지 모르겠다. 평양성은 남쪽으로 패수에 닿아 있다.’

한 것은 옳지 않다. 대개 수·당 사이에 조선의 군·현이 폐지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고을의 이름과 지명들이 모

두 전해 오면서 달라져 사실과 틀린 것이 많다. 지금은 한서가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한백겸은 위만조선의 패수가 대동강이 아니라는 확신에 따라 마자수가 곧 압록강이라

고 단정하고 당서에 근거한 대동강설을 부정하면서, 한서』「조선의 패수 기록이 정확하

다고 주장하였다. 패수 압록강설은 사기』「조선열전』「조선전를 근거로 주장되었

. 반면 한백겸은 같은 사서를 바탕으로 패수 청천강설을 강조하였다.

 

3) 대동강설-안정복

안정복(1712-1791)의 패수 대동강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위만이 동쪽으로 패수를 지나 처음 정착한

옛 진()의 공지 상하장·왕험성·한사군은 대동강 이남에 있어야 한. 이점에서 지금의 평양을 위만

조선의 수도로 보고서 패수를 찾으면 그 실지를 얻지 못한다.”라고 지적하면서 한양을 평양으로 보고

대동강설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의 평양은 기자가 도읍한 곳이다. 지금의 한양에도 평양이란 이름이 있다. 삼국사기』「신라기를 보니 김헌창의 아들이 평양에 도읍하였다.’ 되어 있다. 같은 책 지리지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 남쪽 평양을 취하여 도읍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모두 지금의 한양을 가리킨다. 한양을 또 평양이라고 칭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생각건대, 전국의 말기에 기씨가 그 땅을 잃고 동쪽으로 지금의 한양으로 와서 살았다. 이러한 이유로 결국 옛 이름을 그대로 칭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위만이 도읍한 곳은 평양으로 또한 지금의 한양이다. 만일 이와 같다면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大同江)임은 믿을 만하다. 또 상고하건대, 한서』「지리지는 모두가 당() 때 전벌 및 강역과 경계가 정해졌을 때 편찬된 것이다. 때문에 그 글이 모두 진실되고 답험된 것으로 멀리서 잘못 전해들은 말이 아니다.”

 

이처럼 안정복은 한사군이 대동강 이남에 있다는 연역법적논리에 따라 대동강이 패수라는 결론을 내고 이에 따라 상하장의 위치도 사적 근거 없이 지금의 해서지방으로 보았다. 하지만 상하장이 해서지방이고 삼한이 한강 이남이라면 한사군은 대동강 이남 한강 이북에 설치되어야 하므로 이 지역에 한사군을 모두 수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욱이 패수가 대동강이라면 기자와 위만의 본거지인 상하장과 왕험()은 현 평양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적 모순을 그는 현재의 평양이 왕험성이 아니라 삼국사기』「신라기지리지에 보이는 평양을 한양이라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평양이라는 전제 아래 평양이 한양(현 서울)이라는 논리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7/10/24 [17:07]  최종편집: ⓒ greatcorea.kr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