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국제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중국의 중앙정권(수), 지방정권(고구려)에게 참패당해 (7부)
시진핑, "한국(고구려)은 중국(수나라)의 일부"는 허구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10/30 [23:08]


 시진핑은 한국(고구려)은 중국(수나라)의 일부(지방정권)라고 했는데 이는 틀린 말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고 하면서, 그런 수나라와 고구려가 동시대에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은 고구려가 중국이 아니었다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공정과 같은 의미인 시진핑의 발언은 허구 그 자체임이 밝혀진 것이다.

 

그들 말대로 중국의 중앙정권인 수나라가 지방정권인 고구려와 어떻게 싸웠고 또 그 결과가 어찌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전쟁의 결과는 수문제가 지휘한 중국 중앙정권의 참패였다. 598년 중국을 통일한 수 문제는 3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정벌했다가, 장마로 군량미 수송이 제대로 안 된데다가 전염병까지 돌아 80~90% 병력이 거의 전멸했다고 한다. 이 전쟁은 그야말로 지방정권(?)의 압도적인 대승이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전쟁의 결과는 과연 어떠했을까? 604년 아버지 문제를 시해하고 수나라 2대 왕에 오른 양광(楊廣)은 고구려 정벌을 위한 사전준비작업으로 전쟁물자 수송용 운하를 건설하는 한편, 607년 고구려 공격 시 배후의 위협이 될 돌궐을 설득하기 위해 방문한다. 수양제가 돌궐 계민가한의 장막에 도착했을 때 마침 고구려 사자와 맞닥뜨려 같이 만났다고 한다.

 

▲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수양제로 분한 김갑수씨                                                    ©편집부

 

수양제의 1차 고구려 침공

 

수문제의 고구려 침공의 실패원인이 군량미 수송의 실패 때문이라고 본 수양제는 군수물자 수송용 운하인 영제거와 통제거를 만들라는 명을 내린다. 운하가 완공되자 612년 수양제는 드디어 300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한다. 전투병력이 113만 3800명이고, 군량수송인원이 이것의 곱이었다 하니 300만 명이 넘는 병력으로 이는 세계전쟁사에 있어 초유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렇게 병력이 많다는 것은 정예병이 아닌 오합지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하튼 각 군(軍)마다 대장(大將)과 아장(亞將)을 각각 1명씩 두고, 기병은 40대(隊)를 두었는데 1대는 100명이고 10대가 1단(團)이 되게 했다. 보병은 80대를 4단으로 나누어 단마다 각각 편장(偏將) 1명을 두었으며, 갑옷, 투구, 갓끈, 인장끈, 깃발의 색깔을 다르게 했다.
                     

매일 1개 군씩 출발시키되 각 군의 간격을 40리로 하여 연이어 점차로 나아가게 하니, 40일 만에 출발이 다 끝났다. 앞서 출발한 군의 뒤와 다음 군의 앞이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연이어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수양제 진영에 있는 12위(衛), 3대(臺), 5성(省), 9시(寺)를 내·외·전·후·좌·우의 6군으로 나누어 뒤따라 출발시키니 이 대열 또한 80리에 다다랐다. 그야말로 군사출동의 성대함이 실로 어마어마했다.

 

2월에 양제가 도착하니 수나라는 요수를 건너기 위해 3개의 부교(浮橋)를 만들어 설치했는데 측정을 잘못해 한 길이나 짧아 동쪽 언덕에 닿지 못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이틀 만에 다시 부교를 설치해 요수를 건너니 이번에는 고구려 군사가 크게 무너져 만여 명이 죽었다. 수나라 군대는 요수에서 전진해 3백만 대군으로 요동성을 포위한 후 전력을 다해 공격했으나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 때 육군과 협공작전을 하기로 한 내호아의 수군은 패수(浿水)로 들어와 평양성과 60리 지점에서 고구려 군사와 싸워 크게 이긴다. 전공에 눈이 먼 내호아는 고구려의 유인작전인지도 모르고 평양성까지 깊이 들어갔다가 고구려 복병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만다. 내호아는 살아남은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 주둔했으나 전투를 수행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수군이 참패하고 게다가 육군까지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수양제는 각 병사들에게 100일치의 식량과 갑옷, 무기, 천막 등을 지급하고는 평양성으로의 진군을 명했다. 우문술이 병사들에게 ‘도중에 곡식을 버리는 자는 참수한다.’는 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1인당 200키로가 넘는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는 병사들은 군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려 행군이 중간쯤 갔을 때 양식이 바닥나고 만다.

 

▲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살수대첩의 주역 연개소문과 영양태왕     © 편집부

 

고구려 영양태왕은 적정을 살피기 위해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에게 거짓항복을 하라고 명한다. 그 전에 수양제는 우문술에게 밀서를 보내 “만일 고구려 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면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라는 엄명을 내렸으나 우문술은 을지문덕을 그냥 살려 보내고 만다. 우문술은 이내 후회하고는 사람을 시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다시 돌아오라”고 했으나 을지문덕은 그대로 압록수를 건너 가버렸다.

 

우문술이 군사를 동원해 을지문덕을 추격하자 고구려 군은 수나라 군사들이 굶주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패하는 척하며 도주했다. 수나라 병사들이 드디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를 건너 평양성과 30리 거리 있는 산에 진을 치자 을지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면서 다음과 같은 시 한수를 적어 보낸다.

 

            神策究天文 (신과 같은 책략은 천문을 궁구하였고)
            妙算窮地理 (기묘한 계산은 지리에 궁리하였네)
            戰勝功旣高 (싸움을 이기어 공이 이미 높으니)
            知足願云止 (만족을 느끼고 그쳐 주기를 바라노라)

 

우문술은 병사들이 지칠 대로 지쳐 싸울 의욕이 없는데다가 또 평양성이 험하고 굳건해 함락시키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해 거짓항복을 구실로 회군하기로 결정했다. 수나라 병사들이 방진(方陣)을 만들며 후퇴하자 고구려 군이 사방에서 들이치니 우문술은 가다가 싸우고 또 가다가 싸웠다. 드디어 수나라 군대가 살수(薩水)에 도착해 강을 반쯤 건널 무렵에 고구려 군사들이 후군을 공격하니 적장 신세웅이 전사하고 대열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남은 군사들이 달아나 압록수에 도착하니 하루 낮밤으로 450리를 걸었다. 처음 9개 군(軍)이 선봉으로 요(遼)에 왔을 때 무려 30만 5천명의 병사들이 있었는데, 요동성으로 되돌아왔을 때는 겨우 2,700명 뿐이었다. 수양제는 크게 노해 우문술 등을 쇠사슬에 묶고는 7월 25일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렇듯 수양제의 1차 고구려 침공은 수나라의 대참패로 끝났던 것이다.

 

▲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도                                                                                              ©편집부

 

고구려는 수나라의 지방정권이 아니다.

 

동북공정의 표현대로 중국의 중앙정권인 수나라가 어떻게 일개 지방정권인 고구려에게 28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한방에 몰살하는 참패를 당할 수 있겠는가? 수나라 양제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싸운 이 전쟁은 중국의 내전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대 중국과 한국이 겨룬 국제전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근거는 612년 정월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탁군에 모인 병사들에게 내린 조서에 조칙으로 내리는 나의 엄명을 (고구려의) 임금은 한 번도 직접 받는 일이 없으며, 그 임금이 나에게 직접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도 행하지 않았다. 중국의 반역자들을 수없이 유혹하고, 변방에 있는 우리의 봉후들을 자주 괴롭혔다.”라는 문구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동방의 나라 모두가 조공을 바치고 제후들이 천자를 알현하며, 모든 나라가 신년이 되면 하나같이 축하사절을 중국에 보내는데, 고구려는 이때 조공하는 물품을 탈취하고 다른 나라 사절이 왕래하는 길을 막고 있다. 천자의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에 갈 때, 칙사의 행차는 속국의 국경을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고구려는 도로를 차단하고 우리의 사신을 거절하니, 이는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보면 고구려는 분명 중국과 아무상관이 없는 자주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문구를 바꾼 시진핑의 한국은 중국의 일부라는 발언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기록을 보면 볼수록 완전히 허구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중국을 통일했다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쳐들어왔다가 한방에 28만 명이 몰살당한 것만 봐도 고구려는 결코 수나라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기는 시진핑은 역사에 대해 무지한 거짓말쟁이일 뿐이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7/10/30 [23:08]  최종편집: ⓒ greatcorea.kr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