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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이 30만 비려군을 깬 곳은 산서성 남부 (7부)
영락 5년(395) 2월 비려 정벌 후 8월 패수에서 백제 격파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7/11/09 [20:28]

 

집안에 서있는 호태왕 비문 17행에는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碑麗不息征旅躬率往討 過富山負山至鹽水 攻破其三部族六七百營 牛馬羣羊不可稱數 於是旋駕因過襄平道 東來候城力城北豊五遊觀土境田獵而還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그 번역은 다음과 같다.

 

(번역문) 영락 5년 을미년(395)에 비려(碑麗)가 끊임없이 침공하므로 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했다. 부산(冨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까지 이르러 그 3개 부족과 6~7백 군영을 깨뜨리니 (노획한) ··양떼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어가가 개선하면서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쪽으로 오면서 후성(候城), 역성, 북풍, 오유에서 땅의 경계를 보고 사냥을 하고 돌아왔다.

 

위 비문의 내용은 <고구리사초략>영락 5(395) 을미 2, 비리(卑離)가 점차 왕의 정치(王化)를 따르지 않기에 파산(叵山부산·부산을 지나 염수까지 이르러 친히 정벌했다. 그들의 부락 700여 곳을 깨뜨렸고 노획한 소···돼지가 엄청나게 많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호태왕의 이 위대한 업적은 이상하게도 <삼국사기>에는 전혀 언급이 없다.

 

비려의 30만 대군을 격파한 호태왕

 

호태왕이 정벌한 상대가 공적비문에는 비려(碑麗) 또는 패려(稗麗)인 반면에, <고구리사초략>에는 비리(卑離)라고 기록되어 있다. 글자는 서로 다르나 발음이 서로 비슷해 같은 나라를 시대별로 다른 글자로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려라는 나라는 호태왕 비문에만 있는 반면에, 비리는 여러 사서기록에 있는 소국이라는 점이 다르다. 사학계에서는 이 비려를 거란의 일족이라고 말하고 있다.

 

비리국(卑離國)은 남북 5만 리 동서 2만 리 강역의 환국(桓國)을 구성하는 12개국 중 하나이고, 또한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에 한()3종인 마한, 진한, 변한 중 마한을 구성하는 50여개 나라에 속해 있는 소국으로, 비리국 외에 감해(監奚)비리국, ()비리국, ()비리국, 모로(牟盧)비리국, 여래(如來)비리국, 초산도(楚山塗)비리국 등이 있어 다 합치면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 환국 12개 연방에 속하는 비리국이 북경 근처에 그려진 증산도의 그림     © 편집부

 

지금까지의 통상적인 해석은 호태왕이 비려를 정벌한 이유를 不貢 즉 조공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보다는 不息征旅로 읽히므로 비려가 끊임없이 침공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조공을 안 바쳤다는 이유로 대제국의 태왕이 직접 정벌을 나섰다는 것은 어패가 있으며, 비려가 끊임없이 고구리를 침공했기 때문에 호태왕이 친히 정벌을 결심했다고 봐야 그 이치에 합당할 것이다.

 

또한 일제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3개 부족(部族)3개 부락(部落)으로 축소시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억지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6~700()의 규모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도 없이 그냥 병영(兵營)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겨우 3개 부락과 병영을 정벌하기 위해 호태왕이 직접 친정을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 아니겠는가? 지난 컬럼에서 언급했다시피, 8천 백제병사의 목을 벤 패수에서의 승전도 공적비문에 들어갈 정도가 아니었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겠다.

 

호태왕이 비려를 공격해 격파한 전과가 6~700()이라고 하는데, ()은 현대의 군대편제상 대대급 부대로 병력은 약 500명이다. 따라서 호태왕은 비려를 공격해 6~700영 즉 30만 명 이상의 적군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기에, 이는 가히 공적비문에 새겨질만한 엄청난 전과였던 것이다.

 

고대 군대의 운영제도는 십오제(什伍制)를 기본으로 하였고, 전투부대의 기본단위는 500명의 영()이었다. 영의 상급부대로는 5개 영의 2,500명을 1개 군()이라 했고, 10개 군의 25,000명을 상()이라 했다. 영의 하급단위로는 100명을 도()라고 했으며, 그 아래는 십장(什長)이라 하여 10명을 통솔했다고 한다. 참고로 일본군의 편제에도 분대장급인 십장과 오장이 있었다.

 

호태왕이 대승을 거둔 염수는 어디인가?

 

호태왕이 대승을 거둔 염수는 과연 어디일까? 단재 신채호선생은 부산(負山)을 감숙성 서북쪽의 아랍선산(阿拉善山)이라 했고, 염수는 몽고지지에 의하면 소금기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길란태(吉蘭泰)라는 염수가 있어 물가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덩이가 응결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대개 광개토태왕의 발자취가 감숙성 서북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라고 <조선상고사>에서 밝혔다.

 

그런데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의하면 5년 을미년(395)에 호태왕이 친히 염수까지 이른 때가 2월이며, 백제의 진무가 쳐들어오자 태왕이 직접 기병 7천을 몰아 패수(浿水)의 북쪽에서 8천여 수급을 벤 때가 8월이다. 불과 6개월 사이에 태왕의 친정이 두 번 있었다면, 두 지역은 서로 가깝게 위치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패수 위치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3624참조)

 

이 기록에 단재선생의 염수비정을 대입하면 호태왕이 2월에 염수에서 비려를 친정한 후, 8월에 패수에서 백제와 친히 전쟁을 치렀다는 말인 것이다. 개인이 감숙성 서부에서 하남성 패수까지 걸어간다면 6개월이면 되겠으나, 대규모 전쟁 그것도 태왕이 친정하는 전투부대가 2월에 감숙성 서부에서 싸운 후 8월에 하남성 패수에서 전쟁을 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신채호선생의 감숙성 염수비정은 잘못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호태왕이 비려를 정벌하기 위해 간 염수는 어디일까? 중국에는 여러 곳에 소금이 생산되는 호수가 있다. 이 중 유명한 곳으로는 신강성 합밀시 이오현에 있는 염지향(新疆哈密市伊吾县盐池乡)과 단재 신채호 선생이 언급한 감숙성 서부 영하회족자치구 오충시에 있는 염지현(宁夏回族自治区吴忠市盐池县)과 산서성 남부 운성시에 염지가 있다. 이 중 6개월 사이에 호태왕이 친정할 수 있을 정도로 패수와 가까운 곳은 산서성 운성시 염지뿐이다. 필자가 주먹구구로 비정을 했는데, 과연 옳을까?

 

▲ 산서성 남부 운성염지에서 소금이 생산되고 있는 모습     © 편집부

 

비문에 새겨진 다른 지명으로 이 염수가 어디 부근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먼저 비문에는 호태왕이 비려를 정벌하고 개선한 길이 양평(襄平)도이고, 동쪽으로 오면서 후성(候城)을 지났다고 새겨져 있다. 이 양평과 후성은 <한서지리지>에서 유주의 요동군에 속하는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염수는 요동군에서 그다지 멀지 않아야 할 것이다.

 

(辽东郡 요동군)秦置属幽州(유주)户五万五千九百七十二口二十七万二千五百三十九县十八襄平(양평)有牧师官莽曰昌平新昌无虑西部都尉治望平大辽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行千二百五十里莽曰长说候城(후성)中部都尉治辽队莽曰顺睦辽阳(요양)大梁水西南至辽阳入辽莽曰辽阴险渎居就室伪山室伪水所出北至襄平入梁也高显安市(안시)武次东部都尉治莽曰桓次平郭有铁官盐官西安平(서안평)莽曰北安平莽曰文亭番汗水出塞外西南入海沓氏

 

▲ 유주에 속한 요동군(양평,후성)과 현토군(남소)과 낙랑군(패수)과 상곡군(염지)     © 편집부

 

▲ 부산을 지나 2월에 염지에서 비려를 깬 후 8월에 패수에서 백제를 격파한다     © 편집부

 

또한 호태왕이 비려를 치기 위해 지나간 곳이 파산(叵山부산(冨山부산(負山)인데, 이중 부산(冨山)이 어디였는지를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중천대제 12(259) 을묘 12, 갑자기 위나라 군대가 쳐들어왔기에 위위장군 목원을 시켜 날랜 기병 5천을 추려서 양맥곡에서 대파했다. 위장 위지개의 목과 8천여 수급을 베었고 노획한 병장기와 마필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이를 양곡대전이라 한다. 황상은 목원을 현토태수로 삼고 부산(冨山)공으로 봉했으며, 후에 마산(馬山)공으로 바꾸어 봉했다.”

 

즉 부산은 바로 현토군에 있는 지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산서성 남부 임분시 동남쪽에 부산(浮山)현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그곳이 옛 유주에 속한 현토군 지역이므로 그곳이 富山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하겠다. <한서지리지>에 의하면 현토군 지역에는 남소성이 있어야 하는데, 남소성은 신성인 곡옥(曲沃)현의 동북쪽이다. 서로 위치가 거의 일치하고 있다.

(남소성 위치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9858참조)

(신성의 위치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0275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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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1/09 [20:28]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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