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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합쳐질 때마다 새로운 강이름이 생겨났다. (4부)
유주를 북경 부근으로 비정함은 중국식
 
황순종 고대사연구가 기사입력  2018/06/11 [21:40]

 

지금까지 패수의 흐르는 방향을 중심으로 고찰하여 수경이나 설문해자의 기록이 옳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2항에서 열수와 패수에 대해 필자가 비정한 결과를 뒷받침해 보았다. 이제 수경13 및 권14의 강들이 지나는 군현들을 <지도 1>에서 간략히 검토하여 마지막에 기록된 패수를 보다 명확히 밝히기로 하겠다. 2항에서 이미 본 탑수(영정하)는 지금 북경시의 서남부를 지나며, 습여수(북운하)와 고하(백하)는 각각 그 북쪽인 북경시의 ()북쪽에서 시작하여 중앙 지역을 관통한다. 수경에는 이 강들이 만나는 북경 중남부가 옛 어양군이라고 말한다.

 

그 다음에 기록된 포구수도 주로 어양군을 지나는데 지금의 노하로 추정되며, 북경 동남쪽으로부터 천진 서쪽에 이른다. 다음의 유수는 요서군의 영지현을 지나 해양현을 지난다고 했는데 지금의 청룡만하로 추정된다. 청룡만하는 바로 위에 언급한 노하의 약간 북쪽에서 노하와 대략 평행으로 흐른다. 그러므로 어양군의 북쪽에 요서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지역 또한 북경 동남쪽에서 천진 서쪽에 걸쳐 있다.

 

다음의 대요수는 요동군의 여러 현을 지나는 중요한 강이므로 수경원문을 인용키로 하겠다.  

대요수는 새외의 백평산을 나와 동남쪽으로 요새로 들어온다. 요동 양평현 서쪽을 지나고 또 동남쪽으로 방현 서쪽을 지난다. 또 동쪽으로 안시현 서쪽을 지나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또 현도군 고구려현에 요산이 있어 소요수가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요대현에 이르러 대요수로 들어간다.” 

 

대요수가 요새로 들어와 요동군 양평현을 지난다고 했다. 그러므로 이 양평현에 대해 한서』「지리지요동군·양평조에 왕망이 창평이라 했다(莽曰昌平).”고 했는데, 지금 북경의 서북쪽에 창평구가 있으므로 그곳이 옛 양평임을 추론할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은 사기』「흉노열전연나라 역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렀다.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을 두어 호()에 대비하였다.”라는 기록이다.    

 

이 연나라의 장성을 학계에서는 지금 북경의 북쪽에서 요동의 요양까지 동서로 쌓은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이며, 실제는 남북으로 쌓은 것이다. 회남자』「인간훈에는 북쪽으로 요수와 만나며 동쪽으로는 조선과 국경을 맺는(北擊遼水,東結朝鮮)” 장성을 쌓았다고 했다. 즉 중국 북쪽에 동서로 길게 쌓은 장성이 요수에 와서는 동쪽의 조선과 국경을 따라 남북으로 쌓았다는 것이다.

 

흉노열전에 연 장성의 한 끝인 조양은 요서군 유성현이며 다른 끝은 요동군 양평이므로 요수를 따라 남북으로 쌓은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데, 요동이 요서의 동쪽이 아니라 북쪽에 있었던 사실은 곧 이어 볼 것이다. 한 가지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은 창평구가 대요수의 동쪽인 요동이 아니라 오히려 대요수의 가까운 서쪽에 있는 사실인데 이는 뒤에 다시 설명할 것이다.

 

수경의 인용문으로 돌아오면, 소요수가 서남쪽으로 흘러 요동군 요대현에서 대요수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런데 요동군은 그 이름으로 볼 때 요서군의 동()쪽으로 생각되지만 위에 본 요서 지역의 가까운 동쪽에 대요수·소요수처럼 만나는 두 강을 찾기 어렵다. 오히려 요서 지역의 북쪽에서 찾으면 <지도 1>에 북경의 거의 중앙인 순의구 북쪽에서 Y자처럼 만나는 강이 있는데, 즉 백하와 조하로서 백하는 대요수이고 여기에 서남쪽으로 합하는 조하가 소요수라고 보겠다.

 

이렇게 보면 두 강이 만나는 밀운저수지 일대가 요동군 요대현임을 알 수 있으며 그 ()남쪽이 안시현으로, 요동군이 요서군의 동쪽이 아니라 북쪽임이 확인되는데 인용문에 안시현에서 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고 한 부분이 조백신하이다. 또 인용문의 요동군 양평현·방현은 요대현에서 백하 상류 쪽으로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대요수가 양평··안시현들의 서쪽을 지난다고 했으므로 요동군은 대요수를 따라 그 동쪽이 되므로 요동군으로 칭한 것이다.

 

한편 위 인용문에 소요수가 현도군 고구려현의 요산에서 나온다고 했으므로, 현도군은 조하와 백하가 만나기 전의 요동군과 인접한 곳인데, 현도는 3개 현 밖에 없는 작은 군이었으므로 그 범위는 요동군 북쪽에 가까운 지역에 불과했을 것이다. 여기 현도의 고구려현은 그 이름으로 보아 이전의 고구려 땅이었음을 알려주는데, 현도가 서기 전 107년에 설치되었으므로 이때 이미 고구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서기 전 37년에 건국한 동명성왕의 고구려는 옛 고구려를 재건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위치는 현도군(고구려현)과 요동군의 북쪽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유사에 고구려의 도읍 졸본의 위치를 요동현도의 경계라고 한 데서 확인된다.즉 백하와 조하의 상류에 고구려가 있었다는 것으로, 온조왕이 거기서 패수·대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낙랑군의 서쪽인 하북성 지역에 백제를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이 백제에 대해서는 마지막 4항에서 다시 고찰하겠다.

 

수경14에 마지막으로 기록한 강이 패수인데 위에 본 대로 낙랑군을 지나는 강으로 간략히 설명하여 그 위치를 알기 어렵다. 위의 요동군과 함께 생각해보면 국경인 패수는 대요수의 동쪽인 요동의 동쪽에 있는 강으로 보인다. 그러나 곧 이어 보겠지만 패수는 대요수 동쪽의 다른 강이 아니라 필자는 오히려 요동의 서쪽을 흐르는 위의 대요수와 같은 강으로 본다.

 

그 이유는 앞에 언급한 사기』「흉노열전에 전국시대 말에 연나라가 요동 등 5군을 두고 장성을 쌓았다고 했으나, 사기』「조선열전에는 서론에 언급한 대로 그후 한나라가 일어나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요새로 후퇴하여 패수(즉 대요수)가 경계가 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으며 사실상은 우리 민족에게 패수 동쪽 요동의 대부분을 다시 빼앗긴 것으로 추정된다. 사마천이 가장 존경한 공자의 춘춘필법으로 국가의 수치스러운 일을 숨기는 역사왜곡을 한 것이다. 한서』「지리지에 요동군에 18현이 있었으나 그 뒤 후한서에는 11현으로 준 것을 보면, 전한 초기 상황을 한서에 기록한 이후 줄어든 상황이 후한서에서야 파악되는 것이다.

 

또 그 뒤의 진서에는 요동에 8현밖에 없는데, 이는 중국이 동북방의 땅을 우리의 3국에 빼앗겨 가는 상황을 보여준다. 낙랑군도 당초 25현에서 후한 때 18 및 진()나라 때 13(낙랑 6+대방 7)으로 줄었으며, 이는 상곡·어양·우북평··요서 등 동북의 모든 군들에 공통된 현상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중국이 땅을 뺏길 때마다 동북방의 군현들을 재조정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완전히 빼앗긴 군 이름도 다른 군 지역에 이치하여 상징적으로 존속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대표적인 예로 갈석산을 들수 있는데 그 위치에 대해 한서』「지리지우북평군 조에는 여성현이라 하고, 후한서』「군국지요서군 조에는 임유현’, 진서』「지리지낙랑군 조에는 수성현이라고 했다.

 

갈석산의 위치가 후대로 갈수록 점점 동북쪽으로 옮겨가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중국의 영토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거꾸로 경계 지역의 갈석산이 동북쪽으로 더욱 멀리 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진서의 경우만 보더라도 장성이 시작되는(秦築長城之所起)’ 낙랑군 수성현은 원래 진시황이 올랐던 요동군 양평현 부근의 갈석산 지역에 이치된 것으로,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이 될 수 없다.

  

지금까지 필자의 논의를 정리하면수경14의 고하와 대요수 및 패수가 모두 같은 강으로 지금의 백하이며, 수경에는 열수라는 이름은 없지만 다른 문헌의 열수도 같은 강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백하의 상류는 대요수였는데 소요수와 만난 이후의 조백하는 옛 요수이면서 패수라는 다른 이름도 갖게 된다. 조백하는 또 하류에서 둘로 갈라져 바다로 들어가기 때문에 조백신하는 앞에서 본 대로 계속 패수지만, 다른 하나는 고하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수경의 이 세 강에 대한 기록을 보면 첫째, 고하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고하는 새외에서 나오는데 남쪽으로 어양 호노현 북쪽을 지나고, 서남쪽으로 습여수와 합해 노하가 된다. 또 동남쪽으로 옹노현 서쪽에 이르러 사구가 된다. 또 동남쪽으로 천주현에 이르러 청하와 합해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이는 고하의 중·상류가 지나는 군현을 생략하고 하류의 어양군 호노·옹노·천주현을 기록한 것이다.

 

둘째, 대요수에 대해서는 요새 안으로 들어온 뒤의 요동군 양평··안시현에 대해 기록했는데 이는 중류에 대해 쓴 것이다.

 

셋째의 패수는 앞에 본 대로 낙랑군 누방현에서 나와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고 했는데, 이는 최하류만 설명한 것으로 요동군을 지나는 부분을 생략한 것이다.

 

이렇게 세 강에 대해 하나의 강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다른 이름으로 설명한 것이지만, 그 세 강이 전체로 같은 강이라는 부연 설명이 없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매우 큰 혼란을 초래하게 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특히 북경과 그 남쪽 하북성 일대를 흐르는 수많은 강들은 본류와 지류들이 그물같이 얽히고 설켜 결국 천진에서 만나 크게 세 가닥으로 발해에 들어가기 때문인데, 따라서 지금의 백하도 옛 이름 그대로 고하라고도 하고, 또 해하라고도 하여 세 가지 이름을 갖고 있다. 이 중 해하는 백하만의 이름이 아니라 천진에서 발해로 들어가는 모든 강들의 총칭으로 크게 5개의 강을 의미한다. 이 강들도 중하류에서 얽혀 모두 합하므로 해하로 부르지만 서로 합하는 부분마다 새로운 이름들이 생기므로 또한 갈피를 잡기 어렵다.

 

▲   북경 부근을 유주로 보면 위 지도와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편집부

 

 이런 상황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지리적 정보의 정확한 전달도 어렵고 지도도 없으므로, 혼동과 착오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지금의 지도를 토대로 수경과 대조해 본 결과 전체적으로 그 강들을 추정할 수 있었지만, 세부적으로는 지도와 맞지 않는 부분도 더러 있었다. 물론 필자가 부분적으로 잘못 파악한 것도 인정하지만, 다른 곳에서 위의 강들을 찾을 수는 없다고 확신한다.

  

다른 이유는 강들의 흐름이 시대에 따라 일정하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지금의 지도와 옛 기록을 대조하면 어느 정도의 차이는 불가피하다. 황하의 경우만 하더라도 하류의 물길이 여러 번 크게 바뀐 것은 공인된 사실이다. 끝으로, 같은 강이라도 지역마다 사람들이 다르게 부를 수도 있고 또 시대에 따라 이름이 달라져 후세 사람들의 혼동과 착오를 완전히 면할 수는 없다. 지도가 없던 옛날로 갈수록 그런 가능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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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6/11 [21:40]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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