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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의 “한국은 티베트와 형제국” 이유는?
화약고로 변한 중국과 인도의 티베트 국경분쟁
 
성헌식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8/08/06 [17:28]

시진핑 주석은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주변국들에게 경제협력을 약속하고는 한편으로는 군사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는 패권주의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그런 중국의 속셈을 간파한 인도가 일대일로의 핵심사업인 중국·파키스탄 간 경제벨트 구축에 반대하며, “일대일로 사업이 각국의 주권과 영토보전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성명서를 내고 지난 5월 중순 북경에서 열린 일대일로 포럼에도 불참했다.

 

인도의 우려대로 중국은 아프리카 지부티에 첫 해외군사기지를 건설한 데 이어, 인도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해 요충지인 파키스탄의 과다르항을 확보한 뒤 해상무역보호를 명분으로 군함을 배치할 계획이라고 발표했으며, 인도 남쪽 스리랑카 섬에 있는 함반토타 항구의 사용권을 따냈다. 중동산 원유의 80% 이상을 말라카 해협을 거쳐 수입하고 있는 중국 입장에서는 파키스탄의 과다르항을 이용하면 일단 유사시 미국이 봉쇄할 수도 있는 말라카 해협을 통하지 않고도 원유를 수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 인도양에서 해군기지를 구축하려는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인도     ©편집부

 

그러나 이렇듯 야심차게 추진되고 있는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2013년에 일대일로 계획을 발표하면서 1000억 달러(1123천억원)의 해외투자를 약속했는데, 이 중 90%가량이 채무불이행 위험이 높은 나라에 투자되었다. 즉 그동안 신용불량으로 서구의 은행에서 자금지원을 못 받던 저개발 국가들의 인프라에 중국이 담보 없이 투자한 격이라 결국 돈을 떼이든가 아니면 투자금 회수가 불가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최소한 투자된 항구만큼은 중국소유로 할 것이다.

 

중국은 일대일로 프로젝트의 막대한 부실로 인해 주변국들과 갈등이나 분쟁이 심각해질 것이고, 결국 외부 부실채권에다가 내부의 부실금융까지 더해져 경제기조가 흔들려 이로 인해 시정권이 몰락하고 중국이 분열되는 등 큰 변혁을 겪게 될 것이다. 그때 가서야 시 주석이 주창했던 대당성세(大唐盛世)는 그야말로 허장성세(虛張聲勢)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실제로 그러한 조짐이 서서히 보이고 있다. 중국이 인도의 앞바다인 인도양에서 경제적·군사적 교두보(항구)를 확보해나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대국인 인도가 발끈하고 나섰다. 인도는 애초부터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대체할 수 있는 액트이스트(Act East) 프로젝트를 중국과의 관계가 좋지 않은 일본과 함께 동남아 국가들을 섭외하고 있다.

 

또한 인도와 중국의 접경지역에서 6월 중순부터 무력대치가 이어지고 있는데 최근 인도가 산악전 특수부대 병력을 45천명이나 증원했고 대규모 군사훈련도 앞당겨 실전처럼 실시했다. 게다가 인도는 자국으로 수입되는 중국산 제품에 반덤핑관세까지 부과했으며, 최근에는 다른 접경지역에서 국경을 넘으려던 중국군이 인도군에 의해 저지당하면서 서로 투석전과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설마 두 나라사이에 전쟁이야 안 나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는 시진핑의 생각대로 그렇게 원활하게 움직이진 않을 것 같다.

 

전쟁으로 확대될 지도 모르는 중국과 인도의 갈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는 혼란한 틈을 타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재빨리 맥마흔 라인을 선포해 인도와 티베트의 경계선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1949년에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뚱은 이를 인정치 않았고 이듬해 인민해방군을 보내 티베트를 점령해버리고는 인도 북쪽의 카시미르(Kashmir)와 악사이친(Aksai Chin) 지역도 접수해버렸다.

 

이에 인도는 강하게 반발하면서 자국에 유리한 맥마흔 라인을 주장했으나 중국은 이를 무시하면서 악사이친 지역에 신장위구르자치구와 티베트를 연결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등 지배를 더욱 확고하게 했다. 악사이친 지역을 놓고 벌인 인도와 중국의 갈등은 수년간 지속되다가 1959년 티베트에서 중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급기야는 폭발되기에 이른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주인 달라이라마는 중국군의 무력진압을 피해 인도로 피신 가서 망명정부를 세운다. 인도정부는 티베트 망명정부를 인정하고 달라이라마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지원을 계속했다. 그러자 중국은 인도에게 국경선 재설정을 요구했고, 인도는 중국이 티베트에 대한 종주권이 있다는 것까지는 인정했으나 맥마흔 라인이 국경이라는 주장은 굽히진 않았다.   

 

▲ 2008년 퓨리쳐상을 수상한 티베트 유혈사태 취재사진                                 ©편집부

 

그런 상태에서 1961년 인도가 빼앗긴 악사이친 지역에 초소 50개를 설치하자 양국 간에 몇 차례 교전이 발생했다. 이듬해 중국이 군사행동을 개시해 인도군이 설치했던 초소를 모두 없애고는 국경선을 160km나 넘어 들어가는 전쟁이 발발했는데, 3천명이 넘는 인도 군인들이 죽거나 실종되고 4천명의 포로가 잡히는 등 전쟁은 중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부터 중국은 지금까지 악사이친 지역을 실효 지배하고 있으며, 인도는 아직도 악사이친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달라이라마는 인도에서 망명정부를 게속 유지하고 있으며, 중국은 이런 인도의 행위를 맹비난하고 있다. 세계의 화약고는 중동에서 한반도로 왔다가 다시 인도와 중국의 국경지대로 옮아간 것 같다.

 

티베트와 우리는 단군의 후예

 

지역적으로 인도와 매우 가까움에도 티베트 사람들은 인도인과는 생김새가 완연히 다르고 오히려 우리와 얼굴이 많이 닮았다. 십 수 년 전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한국은 티베트와 형제국이다.”라고 말하면서 한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중국의 방해로 오지 못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이유는 <단군세기> 3세 가륵 단군조에 갑진 6(B.C 2177) 열양(列陽)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있도록 하였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곧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시조가 되었다. 병오 8(B.C2175) 강거가 반란을 일으켰다. 단제는 이를 지백특(支伯特)에서 정벌하였다.”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단제가 강거의 반란을 정벌했던 지백특은 바로 티베트를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사초략>의 아래 두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토곡혼은 고구리와도 혈연관계가 있었다.

대장(안원왕) 11년 신유(541) 토곡혼의 왕 과려가 예부상서를 보내 입조하여 한혈마 30, 누런 낙타 50, 서왕모의 벽해치마 및 불로주 등을 공물로 바치고, 미천제의 후예를 자칭하며 서족(叙族)끼리 서로 혼인하기를 청하기에 상께서 흥문(興文)태자와 황상의 동생을 보내 그 나라로 가보게 했다.”

 

이듬해 5, 흥문 태자가토곡혼 과려의 딸 을불(乙弗)와 혼인하여 돌아왔다. 이가 바로 청해(淸海)공주이다. 토곡혼이라는 나라는 동서 4천리 남북 2천리이고, 염지(鹽池)와 기름진 벌판이 있어 목축이 성행하며, 그곳엔 한족(漢族)들이 많고 문물을 완전히 갖추고 있었으며, 관작은 한족의 제도 하나에 의존했으나 유연(柔然)보다 나았다. 그 곳 왕들과 공경들 모두는 모용외의 이복형의 후예들이었으며, 지금의 왕 과려는 미천제의 10세손이라고 했다.”

 

조선대연방의 일원이었던 티베트는 명나라 때까지도 중국에 편입된 적이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토곡혼은 전연을 세운 모용외(慕容廆)의 이복형인 모용토곡혼이 285년에 청해(菁海)지방으로 가서 세운 나라로, 티베트 고원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갖고 있다가 663년에 토번(吐藩)에게 멸망했다. 즉 모용선비족들이 단군의 통치를 받던 티베트를 2세기말부터 지배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티베트는 같은 단군의 후예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청나라의 영토는 건륭제 때 명나라(한족) 영토에다가 그 2배가 넘는 만주, 내몽골, 신강위구르, 티베트, 대만이 포함되는 것으로 확정되어 지금까지 이른 것이다. 1911년에 청나라가 망하자 1913년 티베트의 달라이라마 13세는 티베트에 남아있던 중국의 군대를 내쫓고 티베트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 이유는 한족이 주도한 민국은 티베트와 같은 종족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 명나라 때보다 3배로 커진 청나라 영토. 이것이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는 이유     ©편집부

 

티베트는 1945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독립을 재확인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로 집중되어 있을 때 마오쩌뚱이 인민해방군을 보내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해 버린다. 1959년 인민해방군이 티베트 민중들을 무력으로 진압해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티베트인들이 독립의거를 일으켜 대학살을 당하자 달라이라마는 인도로 망명하게 된다. 1987년 승려들이 주동이 되어 59년 독립의거 이후 최대 규모의 독립 시위가 발생했는데 당시 티베트 당서기였던 후진타오가 군경을 동원해 유혈사태가 또 벌어졌다.

 

수나라 양광과 당나라 태종이 집권한 후 천하의 패권을 놓고 고구리와 한 판 승부를 벌인 이유는 다름 아닌 선비족이 고구리와 같은 단군의 후예였기 때문이다. 만일 수·당이 한족의 나라였다면 그런 무모한 명분싸움인 패권 다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광과 이세민은 하늘 아래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로, 조선의 적장자 고구리에게 무모하게 도전해 천하의 주인이 과연 누군지를 밝히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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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06 [17:28]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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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바리 씻구바리 띠꾸바리 읍내다방주방장 18/08/15 [06:29]
이거지 쉬바!! 잘썼구마잉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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