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리.대진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중국대륙 한복판에 있는 지명 ‘영락진’ (4/8부)
영락진에 있던 영락궁은 광개토태왕의 행궁(?) 유적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2/07/31 [14:36]
 
중국대륙 한복판에 있는 지명 ‘영락진’

중국대륙 한가운데인 황하변에 이상한 지명이 하나 있다. 그 지명의 이름은 바로 영락진(永樂鎭)인데 영락진이라는 지명은 섬서성과 사천성 등 여러 곳이 있는데, 광개토태왕과 관련있는 영락진은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에 있는 운성시 예성현(芮城縣)에 있는 소도시이다. 원래 이곳에는 영락궁(永樂宮)이라는 유적이 있었는데, 이 영락궁이 바로 광개토태왕과 관련 있는 궁궐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영락제와 관련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는 어불성설이다. 동아시아 역사상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쓴 황제는 고구리의 광개토태왕과 명나라 영락제 뿐이다. 그리고 영락진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시기를 추적해보면 분명 광개토태왕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영락진이란 지명이 언제 생겼는지 그 연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영락현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역) 영락현 : 후위에서 설치했다. 북주 때 북평고현으로 옮겨 다스렸기에 폐했다. 북주에서 설치했다. 황성현에 속했다. 당나라 때 황성현 동북 2리의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설치했다. 송나라 때 진으로 했다. 산서성 영제현 동남 120리에 있다. <원화지> <환우기>에 모두 주나라가 영락현을 설치했고, 군으로 가지 않았다. <수지>에 영락군으로 된 것은 오기이다.
(원문) 永乐县 : 后魏置,北周移治北平故县,而此城废。
北周置,寻省,以地属黄城县,唐分黄城于县东北二里永固堡重置永乐县,宋省为镇,故城在今山西永济县东南一百二十里,按《元和志》、《寰宇记》皆云后周置永乐县,不去置郡,隋志作永乐郡,盖字之误也。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의 영락현(永樂縣)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번역) 북주 때 치소로 황성현에 속했다. 당나라가 황성현의 동북 2리에 있는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나누었다. 송 때 진으로 되고 고성은 산서성 영제현 동남 일백이십리에 있다. <환우기> 주 때 영락현이 되었고, 군으로 가진 않았다. 수지에 영락군으로 만들어졌고 盖자는 오기다. 한나라 때 북평현이라 했으며, 북위 때 (5세기 후반 장수왕 때) 영락현으로 불렀다. 당 천보 원년(742년) 만성현으로 개칭했다.
(원문) 后魏置,故城在今河北省满城县西北鱼条山下,北周移治北平故县,而此城废。
后魏置,故治在今河北省徐水县西。后魏置,故治在今山西祁县东
辽置,为锦州治,元省入州,即今辽宁省锦县治。
北周置,寻省,以地属黄城县,唐分黄城于县东北二里永固堡重置永乐县,宋省为镇,故城在今山西永济县东南一百二十里,按《元和志》、《寰宇记》皆云后周置永乐县,不去置郡,隋志作永乐郡,盖字之误也。汉为北平县,北魏称永乐县,唐天宝元年(742)改为满城县。

▲ 산서성 서남단 황하 굴곡지점 부근에 있는 영락진과 예성현으로 옮겨진 영락궁     ©편집부

또한 <중국백과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영락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번역) 동위 540년 북평현 서북의 땅을 쪼개 영락현을 설치해 낙랑군에 속하게 해 군의 치소로 했다. 북주 때 영락현을 창려군으로 다스렸다가, 북주 때 북평고성으로 옮겨 다스렸다. 수 문제 3년(583) 창려군을 파하고 영락현을 이역주로 변경했다가, 수양제 3년(607) 주를 파하고 상곡군으로 하고 영락현으로 거듭 다스렸다. 당 고조 4년(621) 영락현을 역주에 바꿔 속하게 했다. 천보 원년(742) 영락현을 만성현으로 처음 변경했다.
(원문) 东魏兴和二年(公元540年)析北平县西北境,增置永乐县,属乐良郡,同时为郡治。北齐时,永乐县为昌黎郡郡治。北周时永乐县徙治于北平故城,隋开皇三年(公元583年)罢昌黎郡,永乐县更隶易州,大业三年(公元607年)罢州为上谷郡,仍辖永乐县。唐武德四年(公元621年)永乐县改属易州,天宝元年(公元742年)永乐县始更名满城县。

위 중국자료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영락현이란 지명은 북위(386~534) 때 최초로 설치했는데 이때가 바로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왕이 다스리던 시절이었다. 본격적으로 영락현이란 지명을 사용한 시기는 북주(557~581) 때인데 북주는 겨우 24년간 존재했던 나라이므로 행정구역을 개편할 정도의 나라가 아니었다. 즉 북주 때는 고구리 평원태왕 때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영락진이라는 지명은 명나라 영락제가 아니라 고구리 광개토태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중국고대지명대사전>에서의 “당나라 때 황성현 동북 2리의 영고보를 영락현으로 설치했다”는 문구에서 영락현은 광개토태왕의 능(陵)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는 광개토태왕의 능이 어디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남당 박창화선생이 일본 궁내청에서 필사한 <고구리사초.략>에는 광개토태왕의 능을 황산(黃山)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황산(黃山)과 황성현(黃城縣)이 관련이 있을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참고로 고국원제 13년(343년) 도읍을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겼는데 그곳이 영락현과 접한 황성(黃城)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우리는 <중국백과사전>에서 아주 소중한 자료를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은 영락현이 바로 창려(昌黎)현이었으며, 북평군(北平郡)에 속했다는 사실이다. 창려는 갈석산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결정적 자료이다. 중국은 역사왜곡을 위해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 영락진 즉 창려현이라는 지명을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으로 옮겨놓아 마치 고대의 갈석산이 지금의 갈석산으로 보게 역사왜곡을 했다. 고대의 갈석산은 바로 산서성 최남단 황하변에 있는 지금의 중조산(中條山)인 것이다. 

갈석산은 우리 고대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산이다. 왜냐하면 중국 역사상 유명한 9 황제가 갈석산을 등정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인데, 그 9 황제들이란 바로 그 유명한 진시황과 한무제, 위무제(조조), 북주 문선제, 수양제, 당태종 등이다. 진시황은 이곳에 장성을 쌓고 등정했으며, 한무제는 한사군 설치 후 등정했고, 위무제(조조)는 오환족(고구리)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시를 읊었으며, 수양제와 당태종은 요동(고구리) 정벌 때 갈석산을 올랐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은 단군조선의 번조선과 고구리가 이곳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최근 중국이 고무줄처럼 늘리고 있는 진시황이 쌓았다는 만리장성의 서쪽 기점이 바로 이 갈석산(=중조산)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의 강역은 태왕의 신하였던 유주자사 진의 무덤이 발견된 한반도(덕흥리)와 그의 벼슬인 유주 즉 산서성 남부와 북부 하남성까지를 다스리고 있었다고 확정지을 수 있다. 그 사이에 있는 만주 지역과 하북성/내몽고는 당연히 광개토태왕의 강역이 아니겠는가! 
 
▲ 고대 갈석산은 산서성 남단 황하변에 있는 중조산이다. 명나라 영락제 때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으로 옮겨진다.  



영락궁(永樂宮)은 누구를 위한 건축물인가? 

산서성 운성시 예성현에 영락궁(永樂宮)이란 건물이 있다. 이 건축물은 최초 예성현 서남쪽 황하변 영락진(永樂鎭)에 있었던 것을 현재 예성현으로 옮긴 것이다. 중국 측은 이 건물이 원나라 때 세워진 도교 사원으로 명 영락제와의 관련을 말하고 있으나, 명나라 영락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永乐宫始建于元代,,施工期前后共110多年,才建成了这个规格宏大的道教宫殿式建筑群)  

영락진은 한나라 때는 포판현(蒲坂縣), 당나라 때 영락현(永樂縣)이라고 한다. 이후 북송 때 현재의 지명으로 아직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원나라 때 영락궁을 처음 세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해 놓고, 영락현이란 이름은 당나라 때의 것이고 북송 때 현재의 지명이라는 등 앞.뒤가 전혀 안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은 뭔가를 속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과연 이 영락진이란 지명과 영락궁이란 건축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필자의 견해로는 광개토태왕의 것으로 확정 지울 수는 없으나, 아마 광개토태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당나라 때 영락현이란 지명이 생겨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산서성 영락진 출신인 당나라 때 사람인 여씨(呂氏)의 시조를 묘시는 곳으로 위장을 해놓은 듯 보이며, 동서남북 네 방향 중 유일하게 현신(玄神:북쪽의 신)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것으로 보아 뭔가 석연찮은 점이 있다.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묘도 산서성 영락진 뒷산인 구봉산(九峰山)에 있다. 여하튼 깊이 연구해야 할 건축물이다. 
 
▲ 영락진에서 예성현으로 옮겨진 옛 영락궁의 모습     © 편집부


※ 결론은 중국에 의한 지명조작
중국은 산서성 운성시 영제시에 있던 노룡을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으로 옮기면서 그 근처에 있던, 유수(난하)와 갈석산과 창려도 같이 옮긴 것이다. 즉 산서성 남부에 있던 모든 고대 지명을 하북성으로 옮김으로서 고대 동이족의 강역은 산해관 이동이라는 역사왜곡을 자행했던 것이다.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역사왜곡은 수백 년을 내려오다 민국이 탄생하면서 일제와 합세하여 우리의 역사를 말살했으며, 현재에도 동북공정을 통해 위대했던 우리의 고구리 역사를 자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지금까지 이런 역사왜곡을 자행함으로서 동아시아 인류사에 엄청난 죄를 지었다. 그리고도 그 잘못을 느끼지 못하고 또 다시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것 역시 동아시아의 20억 인구의 역사에 엄청난 죄를 지은 것이다. 역사란 있었던 사실 그대로 기록이 되었을 때 그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왜곡되고 조작된 역사는 창작소설일 뿐 역사적 사료로의 가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기사입력: 2012/07/31 [14:36]  최종편집: ⓒ greatcorea.kr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목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