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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비문의 염수는 어디인가? (5/8부)
광개토태왕 비문의 비리와 염수는 산서성 남부 운성시 일대
 
성훈 컬럼니스트 기사입력  2012/08/02 [16:54]
 
나. 비문으로 본 광개토태왕 때의 강역

3대 대무신제와 태조황제를 거치면서 넓은 강역을 보유했던 고구려는 위나라 관구검과 후연 그리고 백제 근초고왕에 의해 국세가 많이 위축된다. 그렇게 위축되었던 高句麗의 강역을 다시 회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강역을 넓히고 백제, 신라, 왜를 모두 복속시킨 분이 바로 광개토태왕인 것이다.  

1.비려(碑麗)와 염수(鹽水)는 어디? 

(1면 7행 원문)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碑麗不歸#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至鹽水上, 破其三部落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于是旋駕, 因過襄平道, 東來#城, 力城, 北豊, 王備獵, 游觀土境, 田獵而還.
(번역) 영락 5년은 을미년으로 왕은 비려가 고구리인들을 돌려보내지 않았기에 몸소 토벌에 나섰다. 부산과 부산을 지나 염수에 이르러 3부락 6~7백 명을 파하고 소, 말, 양떼를 헤아릴 수 없이 노획했다. 그곳에서 돌아오면서 양평도를 거쳐 동으로 왔다. 동래#성, 역성, 북풍에 이르러 왕은 사냥준비를 시켰다. 순유와 사냥을 하며 돌아왔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 없다보니(삭제된 듯) 사학계에서는 외면하고 있으나, 남당 박창화선생이 필사한 <고구려사초.략>에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다. “비리(卑離)가 점차 왕의 가르침을 어기기에 친히 파산(叵山),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정벌하고 염수(鹽水)까지 이르면서 그들의 부락 700여 곳을 깨뜨렸고 소, 말, 돼지를 노획한 것이 만으로 셈이 되었다.” 

비문의 비려(碑麗)나 사서의 비리(卑離)는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요서군 비여(肥如)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비여는 비려나 비리의 이두식 문자 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아래 <한서지리지>에서 보듯이 비여는 고죽성이 있는 영지와 같은 경내인 요서군에 있으며, 당취수(=마자수=압록수), 유수(=난하)와도 같은 경내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요서군의 기준이 되는 고죽성이 있는 영지(令支)현은 현 산서성 운성시 영제(永齊)시이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이 있는 영지현)。莽曰令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요서군에 있었다는 유수(濡水)는 난하의 고명이며, 중국의 하천 관련 사서인 <수경주(水經注)>에도 유수는 분명 고죽성(노룡)과 같은 경내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비여 자체가 노룡이었다는 중국 자료도 있다. 따라서 아래 <수경주> 기록에 언급된 노룡과 유수와 비여는 모두 요서군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水经注》濡水:“玄水又西南径孤竹城北西入濡水。....沿玄水、濡水出卢龙塞
“濡水从塞外来,东南过遼西令支县北……濡水又东南经卢龙塞塞道。自无终县东出,渡濡水,向林兰陉,东至清陉。卢龙之险,峻阪萦折,故有九峥之名矣。”在记述濡水所经地区山陵、原隰、城邑、关津的地理情况之后,作者又穷源竟委,插叙“濡水又南,黄洛水注之。水北出卢龙山 

따라서 광개토태왕은 산서성 최남부인 운성시에 있는 고죽성(노룡) 근처에 있는 염수까지 간 것으로 보인다. 즉 광개토태왕의 염지는 바로 산서성 운성시에 있는 운성염지(運城鹽池)라 할 것이다. 운성염지의 길이는 35km로 마치 바다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즉 광개토태왕은 백제 근초고어라하에게 잃어버린 고구려의 옛 강토인 요서(遼西)를 수복한 것이다. 이어 광개토태왕은 남진하여 계속 백제와 신라와 왜를 정벌한다.

▲ 광개토태왕 비문의 비리는 비여로 유주의 요서군에 속한 현으로 산서성 남부     © 편집부

2. 백제 아신왕의 항복 

(원문)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 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伐殘國.
(번역) 백잔(백제), 신라는 옛날부터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고구려는)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온 왜를 격파했고 백잔과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이에 6년 병신년에 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해석이 여러 가지임) 

위 문구로 일제는 조선침략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이론적 근거인 정한론(征韓論) 즉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조작하게 되는 것이다. 일제가 비문을 변조했다는 이론도 있으나, 글자 그대로 해석을 해도 왜가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고구리가 그렇게 한 것으로 해석되어 진다. 왜냐하면 고구리 태왕의 비석에 왜가 주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정인보 설). 참고로 왜는 나중에 광개토태왕에게 완전 초토화된다. 

이후 광개토태왕은 백제의 아신왕에게 영위노객(永爲奴客)이 되겠다는 맹세와 함께 백제를 복속시킨다는 기록이 비문에 남아 있다. <고구려사초.략>에는 “6년 병신(396년) 상이 몸소수군을 이끌고 대방과 백제를 토벌하여 10 여성을 함락시키고 그 동생을 인질로 잡아서 돌아왔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이 <삼국사기>에는 거의 대부분이 삭제되어 있으나, <고구려사초.략>에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 MBC에서 방영된 <태왕사신기>에서 아신왕이 광개토태왕에게 항복하는 장면     © 편집부

또한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따르면, 5년 을미년(395년) 광개토태왕이 친히 염수까지 이른 때가 2월이며, 백제의 진무가 쳐들어와 태왕께서 직접 기병 7천을 몰아 패수(浿水)의 북에서 8천여 급을 노획한 때가 8월이다. 불과 6개월 사이에 태왕의 친정이 두 번 있었다면 이 두 지역은 서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부산을 감숙성 서북쪽의 아랍선산(阿拉善山)이라 하였고, 염수는 몽고지지에 의하면 소금기가 있는 호수나 강이 허다한데 아랍선산 아래에 길란태(吉蘭泰)라는 염수가 있어 물가에 늘 2자 이상 6자 이하의 소금덩이가 응결된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대개 광개토태왕의 발자취가 감숙성 서북에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고구려 역사상의 유일한 원정이 될 것이다.”라고 <조선상고사>에 기고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에 단재선생의 염수비정을 삽입해 비교해 보면, 태왕께서 2월에 감숙성 서부에 있는 염수까지 친정(親征)했다가, 8월에 다시 고구리의 남쪽에 있는 패수(浿水)에서 백제와 친히 전쟁을 치루었다는 기록이다. 만일 <고구려사초.략>의 기록이 맞다면 단재선생의 이 염수비정은 잘못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파발마 혼자 갔다 온다면 6개월이 충분히 가능하다 하겠으나, 대규모 전쟁 그것도 황제가 친정하는 군대가 2월에 감숙성 서부에서 전투를 치루고 8월에 고구려의 남쪽 경계인 패수(북부 하남성)에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일정상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산서성 남부에 있던 염수(운성염지)와 비여(노룡)는 원래 고구리의 강역이었으나, 고구리 고국원제 때 잃어버린 요서(遼西) 땅이었는데 광개토태왕이 이를 회복하였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는 계속 남쪽으로 진격해 백제를 완전 복속시키고, 신라 땅에 쳐들어온 왜를 추격하여 정벌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광개토태왕은 과연 어디까지 갔을까? 

▲ 광개토태왕 비문에 언급된 염지는 산서성 최남부 운성시시에 있는 염지는 우리와 고대 중국의 꼭 빼앗아야 하는 쟁탈지였다. 소금은 당시 국가의 부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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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8/02 [16:54]  최종편집: ⓒ greatc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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